목차
12장에서 GMP의 정신을 한 문장으로 줄였습니다 — “정해진 대로 만들고(SOP), 만든 대로 기록한다.” 13장부터 16장까지 ‘정해진 대로 만드는’ 쪽을 걸어왔다면, 이번 17장은 나머지 절반, ‘만든 대로 기록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살아 있게 하는 세 개의 관리 — 변경관리·일탈관리·CAPA — 를 다룹니다.
문서와 기록은 화장품 공장에서 가장 지루하게 여겨지는 일입니다. 손이 많이 가고, 당장 제품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GMP의 세계에는 냉정한 격언이 있습니다 — “기록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들고 잘 검사했어도 기록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으면 그 품질은 ‘운 좋게 나온 것’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문서·기록은 품질의 기억이자 증거이며, 문제가 생겼을 때 되짚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입니다.
17-1. 왜 문서·기록인가 — 정함과 증명의 두 축
문서와 기록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그림 17-1). 문서(document)는 일을 하기 전에 미리 정해 두는 것입니다 — 어떻게 만들지(SOP), 무엇이 합격인지(규격), 무엇을 얼마나 넣을지(처방·제조지시)를 앞서 약속합니다. 반면 기록(record)은 일을 한 뒤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기는 것입니다 — 누가, 언제, 무엇을, 얼마나, 어떤 결과로 했는지를 사후에 붙듭니다.
이 둘은 짝을 이룹니다. 문서만 있고 기록이 없으면 ‘정해 놓고 지켰는지 알 수 없고’, 기록만 있고 문서가 없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서가 있어야 누가 만들든 같은 품질을 재현할 수 있고(재현성), 기록이 있어야 나중에 되짚어 증명·추적할 수 있습니다(추적성). 13장의 로트 추적, 14·15장의 판정, 그 모든 것이 결국 문서(기준)와 기록(실제)의 맞물림 위에 서 있습니다. 문서·기록 관리는 ‘서류 작업’이 아니라 품질을 재현하고 증명하는 뼈대입니다.
17-2. 문서의 위계 — 정책부터 양식까지
공장의 문서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위계(hierarchy)를 이룹니다(그림 17-2).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추상적인 방침에서 구체적인 지시로 내려갑니다.
맨 위는 품질방침·품질매뉴얼입니다 — 회사가 품질을 어떻게 대하는지, 품질 시스템의 큰 틀은 무엇인지를 선언합니다. 그 아래가 표준작업지침(SOP)입니다 — 칭량하는 법, 유화하는 법, 세척하는 법, 검사하는 법처럼 ‘어떻게 하는가’를 단계별로 정한 실무의 핵심 문서입니다. 그 아래가 규격·처방·제조지시입니다 — 원료·반제품·완제품의 합격 기준(규격), 무엇을 얼마나 넣는지(처방), 이번 배치를 어떻게 만들지(제조지시서)입니다. 맨 아래가 기록 양식입니다 — 실제 값을 적어 넣는 빈 서식으로, 여기에 채워진 것이 곧 기록이 됩니다.
이 위계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문서 자체를 관리해야 합니다. 모든 문서는 승인된 것만 사용하고, 최신본이 어느 것인지를 관리하며(버전 관리), 옛 버전은 현장에서 걷어냅니다. 13장에서 인쇄물의 ‘구 버전 혼입’을 경계했듯, 낡은 SOP나 낡은 규격이 현장에 남아 쓰이는 것은 문서 관리의 대표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문서에는 제·개정 번호와 시행일을 붙이고, 배포와 회수를 기록합니다.
17-3. 기록의 원칙 — 믿을 수 있는 기록이란(ALCOA)
기록은 그저 ‘적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의 조건을 다섯 글자로 요약한 것이 ALCOA입니다(그림 17-3). 귀속성(Attributable) — 누가 했는지 알 수 있게 서명·날인한다. 가독성(Legible) — 알아볼 수 있게 쓰고 지워지지 않는 필기구를 쓴다. 동시성(Contemporaneous) — 일이 일어난 그때 바로 적는다(나중에 몰아 적지 않는다). 원본성(Original) — 원본(또는 검증된 사본)을 남긴다. 정확성(Accurate) —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적는다.
여기서 현장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규칙이 나옵니다. 손으로 쓴 기록을 고칠 때는 틀린 것을 지우거나 덧칠하지 않고, 한 줄만 그어 원래 내용이 보이게 둔 뒤, 옆에 바른 값·서명·날짜를 적습니다. 수정액이나 지우개로 ‘없던 일’로 만들면, 그 순간 기록의 신뢰가 무너집니다. 무엇을 왜 고쳤는지가 보여야 기록입니다. 이런 원칙은 종이 기록이든 전자 기록이든 똑같이 적용되며, 최근에는 이를 아우르는 데이터 완전성(data integrity)이 품질의 핵심 화두가 되었습니다. 기록은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게’ 남기는 것입니다.
17-4. 배치 기록 — 하나의 배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배치 기록서입니다(그림 17-4). 한 배치가 태어나 출하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의 묶음으로 남긴 것으로, 흔히 제조지시와 기록이 한 몸으로 되어 있어 ‘지시대로 만들고 그 자리에서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배치 기록에는 그 배치의 일생이 담깁니다 — 칭량(어느 원료 로트를 얼마나), 제조(온도·시간·교반 등 공정 조건과 실제 값), 공정·반제품 검사(색차·점도·경도·pH 등 14장), 충전·포장(충전량·표시기재·라인 클리어런스 10장), 완제품 검사(외관·중량·미생물 15장), 그리고 각 단계의 담당자와 확인자입니다. 이 기록이 완결되고 검토·승인되어야 비로소 출하할 수 있다고 15장에서 말했는데, 그 ‘검토·승인’의 대상이 바로 이 배치 기록서입니다.
배치 기록은 추적성의 척추입니다. 완제품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 기록을 펴 어느 원료 로트가, 어떤 공정 조건에서, 누구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거꾸로 짚습니다. 반대로 원료 로트에 문제가 발견되면 그 로트가 어느 배치들에 들어갔는지 찾습니다. 배치 기록이 부실하면 이 추적이 끊기고, 그러면 회수 범위조차 정할 수 없습니다(15장). 잘 쓴 배치 기록 한 부는, 훗날 사고를 막는 가장 든든한 보험입니다.
17-5. 변경관리 — 바꾸기 전에 검토한다
공장은 멈춰 있지 않습니다. 원료 공급처가 바뀌고, 처방을 개선하고, 설비를 교체하고, 공정을 손봅니다. 문제는 ‘좋게 하려는 변경’이 뜻밖의 사고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경은 함부로 하지 않고 변경관리(change control)라는 절차를 거칩니다(그림 17-5).
원칙은 ‘바꾸기 전에 검토한다’입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첫째 변경 요청 — 무엇을 왜 바꾸려는지 제안합니다. 둘째 영향 평가 — 이 변경이 품질·안전·안정성·표시·법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다른 공정에 파급은 없는지 관련 부서가 함께 따집니다. 셋째 승인 — 책임자가 검토 결과를 근거로 승인합니다. 넷째 실행 — 승인된 범위 안에서만 바꾸고, 관련 문서(SOP·규격·처방)를 함께 개정하며 교육합니다. 다섯째 검증 — 바꾼 뒤 의도대로 되었는지, 새 문제는 없는지 확인합니다(필요하면 안정성 시험까지).
가장 위험한 것은 무단 변경입니다 —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현장에서 임의로 원료를 바꾸거나 조건을 손대는 것입니다. 7장에서 ‘연구원의 판단 없이 임의로 원료를 보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정신입니다. 변경은 개선의 출발이지만, 관리되지 않은 변경은 사고의 출발입니다.
17-6. 일탈관리 — 벗어남을 숨기지 않는다
아무리 잘 정해 두어도, 현장에서는 정해진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온도가 규격을 벗어나고, 시간이 초과되고, 검사값이 기준을 넘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절차나 규격에서 벗어난 일을 일탈(deviation)이라 하고, 이를 다루는 것이 일탈관리입니다(그림 17-6).
일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미리 계획하고 승인받아 벗어나는 계획 일탈과, 예기치 않게 발생한 비계획 일탈입니다. 어느 쪽이든 처리 순서는 같습니다 — 발견 → 기록 → 영향 평가(이 일탈이 제품 품질에 영향을 주는가) → 조치(해당 제품 격리·재작업·폐기 등) → 종결입니다. 그리고 근본 원인이 있다면 다음 절의 CAPA( Corrective And Preventive Action, 시정 및 예방조치)로 이어집니다.
일탈관리의 진짜 핵심은 절차가 아니라 문화입니다. 12장에서 강조했듯 — 일탈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입니다. 급하다고, 혼날까 봐, 별일 아닌 것 같아서 일탈을 덮으면, 그 순간 문제는 지하로 숨어 더 큰 사고로 자랍니다. 벗어남을 드러내 놓고 다루는 조직만이 그 벗어남에서 배웁니다. 그래서 좋은 공장에서 일탈 기록이 많다는 것은 관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17-7. CAPA — 원인을 없애 재발을 막는다
일탈이나 불만이 생겼을 때, 그 자리만 수습하고 끝내면 같은 문제가 반드시 다시 옵니다. 그래서 CAPA(Corrective And Preventive Action, 시정·예방조치)가 필요합니다(그림 17-7). CAPA는 세 가지를 구분합니다.
첫째 시정(correction) — 당장 눈앞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입니다(불량품 격리·재작업·폐기). 급한 불을 끄는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재발을 막지 못합니다. 둘째 시정조치(corrective action) — 그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 없애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를 끝까지 파고드는 근본 원인 분석입니다(19장에서 다룰 5 Why·특성요인도가 이 도구입니다). 표면 원인(‘작업자가 실수했다’)에서 멈추지 않고 진짜 원인(‘그 실수를 부른 절차·표시·교육의 허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셋째 예방조치(preventive action)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막는 것입니다.
CAPA에서 가장 흔한 실패는 ‘시정’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 불량품만 골라내고 원인은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배치에서 같은 불량이 또 납니다. 그래서 CAPA는 조치를 실행한 뒤 정말로 재발하지 않는지(유효성)를 확인하는 단계까지 포함합니다.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없애는 것 — 그것이 CAPA의 정신입니다.
17-8. 하나로 잇기 — 기록이 ‘관리’가 되는 순간
지금까지의 문서·기록·변경·일탈·CAPA는 따로 도는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품질 시스템으로 맞물려 순환합니다(그림 17-8). 그 흐름은 이렇습니다 — 기록을 남기다 보면 일탈이나 불만이 드러나고, 그 근본 원인을 분석해 CAPA로 대책을 세우며, 그 대책이 처방·공정·설비의 변경을 필요로 하면 변경관리를 거치고, 그 결과로 문서(SOP·규격)를 개정하며, 개정된 내용을 교육해 다시 현장의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 고리가 돌 때마다 시스템은 조금씩 더 튼튼해집니다.
이 순환을 떠받치는 마지막 전제가 데이터 완전성(data integrity)입니다. 순환의 어느 고리든 기록이 부정확하거나 조작되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본 ALCOA 원칙이 시스템 전체의 바닥에 깔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도는지는 내부 감사로 주기적으로 점검합니다.
정리하면 문서·기록 관리는 ‘정한 대로 만들었음을 증명하고, 벗어남과 변경을 정직하게 다루며, 원인을 없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품질의 신경계입니다. 제품을 만드는 것은 손과 설비지만, 그 품질을 재현하고 증명하고 개선하는 것은 문서와 기록입니다. 이로써 제3부의 품질 시스템 골격 — GMP, 입고, 공정·완제품 검사, 위생, 문서 — 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18장에서는 이 관리의 근거가 되는 시간의 시험, 안정성 시험의 이해로 제3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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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목차: 메이크업 생산기술 전체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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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장: 18장. 안정성 시험의 이해
- 참고 기관: 식품의약품안전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