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여기서부터 2부, 제형의 과학입니다. 1부에서 원료 하나하나의 성격을 익혔다면, 이제 그 원료들이 서로 만나 제형이 되는 원리로 들어갑니다. 그 첫걸음이자 이 책의 심장이 유화입니다. 서문에서 말씀드린 대로, 스킨케어 생산의 절반은 “유화를 어떻게 잘 만드느냐”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유화가 안 깨지게 어떻게 지키느냐”입니다. 이 장에서는 앞의 절반, 곧 물과 기름이 왜, 어떻게 하나로 섞여 크림이 되는지를 다룹니다. 원리를 알아야 12·13장의 공정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31장의 유화 불량이 왜 생기는지가 보입니다.
5.1 물과 기름은 왜 섞이지 않는가
물과 기름을 한 비커에 붓고 아무리 저어도, 젓기를 멈추면 곧 위아래로 갈라집니다. 물은 극성(전하가 치우친 성질)이라 물끼리 서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기름은 비극성이라 기름끼리 뭉치려 합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두 액체가 만나는 경계면에는 장력이 생기는데, 이것을 계면장력이라고 부릅니다. 계면장력은 쉽게 말해 “물과 기름이 닿는 면적을 되도록 줄이려는 힘”입니다.

그래서 젓는 것을 멈추면, 물과 기름은 서로 닿는 면적이 가장 작아지는 모양 — 위아래로 층이 갈라진 상태 — 로 돌아갑니다. 유화란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한쪽을 아주 잘게 쪼개 다른 쪽 속에 흩어 놓으면, 물과 기름이 닿는 면적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자연이 싫어하는 상태를 억지로 만드는 셈이니, 그냥 두면 다시 갈라지려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유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말은 이 뜻입니다.
5.2 계면활성제가 하는 일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계면활성제, 곧 유화제입니다. 2장에서 보았듯 계면활성제 분자는 물을 좋아하는 머리(친수기)와 기름을 좋아하는 꼬리(친유기)를 한 몸에 지녔습니다. 이 분자는 물과 기름의 경계면에 머리는 물 쪽, 꼬리는 기름 쪽으로 줄지어 배열합니다.

이렇게 경계면을 계면활성제가 덮으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계면장력이 크게 낮아집니다. “닿는 면적을 줄이려는 힘”이 약해지니, 적은 힘으로도 물이나 기름을 잘게 쪼갤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잘게 쪼개진 방울 하나하나의 표면을 계면활성제가 감싸 이웃한 방울과 쉽게 합쳐지지 못하게 막아 줍니다. 계면활성제는 이렇게 “잘게 쪼개기 쉽게” 만들고 “다시 합쳐지지 못하게” 지키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합니다. 유화가 유화로 유지되는 것은 이 덕분입니다.
5.3 O/W와 W/O — 무엇이 무엇 속에 흩어져 있나
유화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어느 쪽이 잘게 쪼개져 흩어진 쪽(내상, 분산상)이고, 어느 쪽이 그것을 담고 있는 바탕(외상, 연속상)이냐에 따라 갈립니다.

O/W(수중유형)는 기름방울이 물 속에 흩어진 형태입니다. 바깥이 물이라 산뜻하고 흡수가 빠르며 물로 잘 씻깁니다. 우리가 쓰는 로션과 크림 대부분이 여기에 속합니다. W/O(유중수형)는 반대로 물방울이 기름 속에 흩어진 형태입니다. 바깥이 기름이라 무겁고 번들거리지만, 유분막이 피부를 오래 덮어 보습이 지속되고 물에도 잘 견딥니다. 지속력과 내수성이 필요한 일부 크림이나 선케어에 쓰입니다.
| 구분 | O/W (수중유형) | W/O (유중수형) |
|---|---|---|
| 구조 | 기름방울이 물 속에 분산 | 물방울이 기름 속에 분산 |
| 바깥(연속상) | 물 | 기름 |
| 사용감 | 산뜻, 빠른 흡수, 물세척 가능 | 무겁고 촉촉, 지속·내수성 |
| 대표 제품 | 대부분의 로션·크림 | 지속형 크림, 일부 선케어 |
| 유화제 | 친수성(높은 HLB) | 친유성(낮은 HLB) |
현장에서 이 둘을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물에 한 방울 떨어뜨려 잘 퍼져 섞이면 바깥이 물인 O/W이고, 뭉쳐서 안 섞이면 W/O입니다. 수용성 색소를 떨어뜨렸을 때 전체로 번지면 O/W, 방울에만 머물면 W/O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유화형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유화형에 따라 사용감도, 안정화 전략도, 심지어 방부제가 어느 상에 있어야 하는지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4장).
5.4 무엇이 O/W와 W/O를 결정하는가
같은 물과 기름을 써도 어떤 때는 O/W가, 어떤 때는 W/O가 됩니다. 무엇이 이를 가를까요.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유화제의 성질입니다.
여기에 오래된 경험칙이 하나 있습니다. 유화제가 더 잘 녹는 쪽이 바깥(연속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에 잘 녹는 친수성 유화제를 쓰면 물이 바깥이 되어 O/W가 되고, 기름에 잘 녹는 친유성 유화제를 쓰면 기름이 바깥이 되어 W/O가 됩니다. 그래서 유화제를 고르는 것이 곧 유화형을 정하는 일입니다.
유화제 말고도 상의 부피비(물과 기름의 양), 온도, 그리고 어느 쪽에 어느 쪽을 부어 넣느냐(투입 방식)도 영향을 줍니다. 다만 실무에서 유화형을 안정적으로 잡는 가장 확실한 손잡이는 유화제의 성질, 곧 HLB입니다.
5.5 HLB — 유화제를 고르는 잣대
2장에서 소개한 HLB(친수성-친유성 균형)를 유화의 관점에서 다시 봅니다. HLB는 유화제가 물과 기름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지를 숫자로 나타낸 것으로, 낮으면 기름 쪽, 높으면 물 쪽입니다. 그래서 만들려는 유화형에 맞는 HLB의 유화제를 골라야 합니다.
| HLB 범위 | 성격 | 주 용도 |
|---|---|---|
| 3~6 | 친유성 | W/O 유화제 |
| 8~16 | 친수성 | O/W 유화제 |
| 15~18 | 강친수성 | 가용화제(투명 제형) |
여기에 한 가지 실무 개념이 더 붙습니다. 유화하려는 오일마다 잘 유화되는 데 필요한 HLB 값이 다르다는 것(required HLB)입니다. 어떤 오일은 HLB 10 근처라야 곱게 유화되고, 다른 오일은 12가 맞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친유성 유화제와 친수성 유화제를 섞어 그 오일에 맞는 HLB를 만들어 씁니다. 처방에 유화제가 두 종류 이상 들어 있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며, 생산자가 임의로 한쪽을 빼거나 바꾸면 전체 HLB가 어긋나 유화가 깨질 수 있습니다.
5.6 상전이와 PIT — 온도가 유화를 바꾼다
유화에는 온도가 개입하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비이온 유화제를 쓴 유화는, 온도를 올리면 어느 지점에서 O/W가 W/O로 뒤집힙니다. 이 뒤집히는 온도를 상전이온도(PIT)라고 부릅니다. 온도가 오르면 친수기가 물과의 친화력을 잃어 유화제가 점점 기름 쪽 성격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PIT가 왜 중요하냐면, 바로 그 전이가 일어나는 온도 부근에서 계면장력이 가장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계면장력이 최소가 되는 이 순간에는 아주 작은 힘으로도 기름이 극도로 잘게 쪼개집니다. 그래서 PIT 부근에서 유화한 뒤 빠르게 식히면, 곱고 균일하며 안정한 유화 입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전이 온도를 이용한 유화법(PIT 유화)입니다. 강한 전단에만 기대지 않고 온도의 힘을 빌려 미세한 유화를 만드는 방법으로, 안정한 로션·크림을 만드는 데 널리 활용됩니다.
여기서 생산자가 얻을 교훈은 분명합니다. 유화에서 온도는 단순히 원료를 녹이는 수단이 아니라, 유화의 곱기와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13장의 공정에서 수상·유상의 온도, 유화 온도, 냉각 속도를 그렇게 까다롭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5.7 크림은 왜 크림이 되는가
이제 이 장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크림은 왜 크림이 될까요. 세 가지가 함께 일어난 결과입니다.
첫째, 유화제가 계면장력을 낮춰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있는 판을 깔아 줍니다. 둘째, 호모믹서 같은 전단(과 PIT 같은 온도의 도움)으로 한쪽을 아주 잘게 쪼개 다른 쪽 속에 고르게 흩뜨립니다. 잘게 쪼개질수록 유화는 곱고 안정해집니다. 셋째, 그렇게 만들어진 미세한 방울들이 다시 합쳐지지 않도록 유화제가 표면을 지키고, 점증제와 고급알코올 등이 바탕(연속상)을 되직하게 만들어 방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듭니다. 여기에 냉각이 더해져 그 구조를 굳혀 줍니다.
이 세 가지 — 계면장력을 낮추고, 잘게 쪼개고, 그 상태를 고정하는 것 — 가 유화의 전부입니다. 크림의 되직함과 안정성은 이 마지막 “고정” 단계에서 나오며, 그 원리는 7장(유변학)에서 더 깊이 다룹니다.
5.8 정리하며
이 장에서 기억하실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물과 기름은 계면장력 때문에 섞이지 않으려 하고, 유화란 이를 거슬러 한쪽을 잘게 쪼개 흩뜨리는 일이라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둘째, 유화제는 계면장력을 낮춰 쪼개기 쉽게 만들고 방울을 감싸 다시 합쳐지지 않게 지키며, 유화제의 성질(HLB)이 O/W냐 W/O냐를 결정합니다. 셋째, 온도는 유화의 곱기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여서, PIT 부근에서 유화해 곱고 안정한 유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원리를 잡았으니, 다음 장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유화제를 어떻게 골라야 잘 깨지지 않는 유화가 되는지, 유화 입자의 크기와 분포가 안정성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 6장에서 유화를 오래 버티게 하는 안정화의 기술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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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기관: 식품의약품안전처

